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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22. 22世 〉40. <부정공>귀정공휘연원묘갈명(龜汀公諱淵元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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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부정공>죽남공휘연준묘갈명(竹南公諱淵濬墓碣銘)
竹南公諱淵濬墓碣銘 竹南趙公於吾先子憤菴爲同鄉深交公有子曰光萬氏吾又得與周旋於文墨爪豆之間者有年矣日手錄公行治請余銘其墓曰以累世之好也而不以是徼惠於子羞也余不得以不文辭乃爲之書曰公諱淵濬剛一諱哲植字淑明號竹南系出玉川高麗侍中諱璋爲肇四傳而諱瑜官副正號虔谷守罔僕義歷相好亭蔭察訪諱智崙而至梅窓諱大成勵節校尉贈户曹佐郎享曲水武曲兩祠諱怡號蓮潭中司馬是公十二世十一世曰宗國曰斗采曰昌源曰民九其四親也妣咸陽呉氏佑文女以高宗乙酉十一月十六日生公于南原帶谷第公儀形頎偒才性卓犖自幼有成人儀度甫就學從大人公移居谷城堂旨村每代父兄任其服勞言行循蹈規矩雖至微細惟親命是從朝耕暮讀一如桐栢行及喪怙恃哀毀踰制兄弟三人序居季既娶婦析著敬兄奉祭不以居異距遠爲間每置忌辰雖升米斤肉無闕致誠節儉治生化簞瓢爲囷廩不溢於自餉不嗇於周施先塋儀物或創或修是恔乃己餘力則潛思黙究涉獵經史趙氏有石汀先生寅錫以經學名從而問質每得嘉獎善於誘人同閈有手荒者嘗一夜失物公使人招喻尋常善惡等常談溫語而不及物遂感服竟爲善人不耆麯蘖不用巫覡罕跡城市御家敎子必以嚴義謙恭自虛恒隱過而揚善故人無怨言性喜藏書殆數千卷石汀先生亦有記焉公雅不喜論著有若干詩文而藏于家以己未三月十六日卒葬于住巖面飛龍嶝子原士林會哭者以百餘數輓誄者多而吾先子亦有追輓配全州崔氏英淳女有士女度生丙戌六月十二日卒乙巳八月五日葬梧谷面龜成里長太洞酉原有床望石生四男三女長卽光萬次光纁東煥東粹女適朴勝牧梁慶會鄭日澤孫輯容澯容出政容珠容萬男奎容彦容纁男東煥嗣澯容暹容憲容俊容東粹男餘不盡錄嗚呼士既無爵祿而列於朝又不値變境乖遇可因以立奇節者則其行之平易而無異特常也夫孰知庸言庸行之自足範世而出俗歟銘曰五芙去彫林月涵精喜愠不色謙虛著誠先子有輓人曰定評小子敢贅只得驢鳴 丙辰至月 日 竹溪 安泰曾 謹撰 죽남공휘연준묘갈명(竹南公諱淵濬墓碣銘) 죽남(竹南) 조공은 우리 아버지 분암공(憤菴公)과 동향으로 교분이 매우 깊으셨다. 공의 아들 광만(光萬)씨와 내가 또 문학(文學)과 유림(儒林)의 모임에서 사귄 지가 몇 년이나 되었었다. 그분이 하루는 공의 행장(行狀)을 써 가지고 와서 묘갈명(墓碣銘)을 청하면서 말하기를 「세교(世交)의 집안 사이에 이 글을 써주지 않으면 그대의 부끄러움이 될 것이네」 하는데, 나는 글을 하지 못한다고 사양할 수가 없어 다음과 같이 쓴다 공의 휘는 연준(淵濬), 또 다른 휘는 철식(哲植)이며 자(字)는 숙명(淑明), 호는 죽남인데 옥천조씨(玉川趙氏)이시다. 고려 때 시중(侍中)을 지낸 휘 장(璋)을 시조로 하며, 四대를 내려와 휘 유(瑜)는 벼슬이 부정(副正)이요 호가 건곡(虔谷)인데 고려를 위하여 절의를 지키셨다. 상호정(相好亭)에 이르러 찰방(察訪)을 지낸 휘 지륜(智崙)이요 매창공(梅窓公)에 이르러서는 휘가 대성(大成)인데 여절교위(勵節校尉)로 호조 좌랑(戶曹佐郎)에 추증(追贈)되어 곡수서원(曲水書院)과 무곡서원(武曲書院)에 배향되어 계신다. 휘 이(怡)는 호가 연담(蓮潭)인데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셨는데, 이분이 공의 十二세조와 十一세조이시다. 휘 종국(宗國), 두채(斗采), 창원(昌源), 민구(民九)가 四대조이시다. 어머니 함양오씨(咸陽呉氏)는 우문(佑文)의 따님이신데 고종(高宗) 을유년 十一월 十六일에 남원(南原) 대곡(帶谷) 집에서 공을 출생하셨다. 공은 모습이 우뚝하고 재주가 탁월하여 어려서부터 어른스런 풍도가 있으셨다. 겨우 학문을 배우면서부터 어른들을 따라다녔다. 공이 곡성 당지촌(堂旨村)으로 이사하여서는 부형(父兄)을 대신하여 일을 하고, 언행이 바르고 법도에 맞아 비록 지극히 하찮은 일이라도 어버이의 명(命)이면 거역하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주경 야독(晝耕夜讀)을 한결같이 동백(桐栢)의 행실처럼 하였다. 부모님 상(喪)을 당하여서는 슬퍼하는 것이 법도를 넘었으며, 세 형제 가운데 막내였는데 장가를 들어서는 형들을 공경하고 제사를 지내는 등의 일에는 멀리서 따로 떨어져 산다고 해서 차이를 두지 않아 제삿날을 당하면 비록 몇 되의 쌀이나 고기 한 근이라도 빠뜨리는 일이 없이 정성을 다하였다. 절약과 검소함으로써 살림을 하여 가난한 살림 속에서도 자신의 생활은 검소했으나 남들에게 널리 베풀기에 힘썼으며, 선영(先塋)의 석물(石物)을 세우거나 수리하는데 힘썼다. 그러는 사이에도 조용히 학문을 연구하여 경사(經史)를 읽으셨다. 조씨 집안에 경학(經學)으로 이름이 알려진 석정(石汀) 인석(寅錫) 선생이 계셨는데 매양 질문을 해보고는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사람을 잘 타일러 같은 마을에 손버릇이 나쁜 사람이 있었는데, 한 번은 밤에 물건을 도둑맞게 되었다. 공이 사람을 시켜 그 사람을 불러다가 선(善)과 악(惡)에 대해 쉬운 말로 따뜻하게 타이르기만 하고 물건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자 그 사람이 마침내 감복(感服)하여 좋은 사람이 되었다. 술을 좋아하지 않으셨으며, 점장이나 무당을 쓰지 않으셨다. 저자의 출입을 드물게 하시고, 집안을 다스리고 자녀 교육을 엄하게 하셨으며, 언제나 겸손하게 사람을 대하고 남의 허물은 감추어 주고 선행은 드러내어 주었기 때문에 남들이 원망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책을 사 모으기를 좋아하여 경서와 백가(百家)의 여러 책이 거의 수천권이나 되어 이에 대해 석정 선생께서도 기록한 바가 있다. 공은 평소 저술(著述)을 좋아하지 않아 약간의 시문(詩文)이 집안에 보관되어 전한다. 기미년 三월 十六일에 돌아가셔 주암면 비룡등(飛龍嶝) 자좌(子坐)에 장례하였는데, 와서 곡(哭)한 자가 一백여 명이나 되었고, 만사(輓詞)를 지어 제사지낸 사람이 많았는데, 우리 아버님께서도 나중에 만사를 지어 제사 지내주셨다. 배위 전주최씨(全州崔氏)는 영순(英淳)의 따님으로 여사(女士)의 풍도가 있으셨는데, 병술년 六월 二十二일에 출생하여 을사년 八월 五일에 돌아가셔 오곡면 귀성리(龜城里) 장태동(長太洞) 유좌(酉坐)에 장례하였는데, 상석과 망주가 있다. 四남三녀를 두었는데, 큰아들은 바로 광만이요, 다음은 광훈(光纁), 동환(東煥), 동수(東粹)요 딸은 박승목(朴勝牧), 양경회(梁慶會), 정일택(鄭日澤)에게 출가하였다. 손잡 집용(輯容) 찬용(澯容) 정용(政容) 주용(珠容)은 광만의 아들이요 규용(奎容) 언용(彦容)은 광훈의 아들이요, 동환의 양자는 찬용이요, 섬용(暹容) 헌용(憲容) 준용(俊容)은 동수의 아들인데,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아, 선비가 이미 벼슬하여 조정에 끼지 못하고 큰 변란(變亂)이 있지 않으면 큰 공로(功勞)를 세울 수가 없어서 그 행적이 평범하고 특별할 수가 없는데, 그 누가 평범한 언행이나 행실도 족히 세상의 모범이 되고 세상을 초월함을 알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다섯 부용을 조각한 듯 숲과 달이 맑고 깨끗하네. 五芙去彫 林月涵精 기쁨과 성냄을 나타내지 않고 겸허하고 정성스럽네 喜愠不色 謙虛著誠 아버님께서 지은 만사 잘 평하였다고 하였네 先子有輓 人曰定評 소자가 감히 말 보태는 것 나귀의 울음소리일 뿐이리 小子敢贅 只得驢鳴 병진년 동짓달 죽계(竹溪) 안태증(安泰曾) 삼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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